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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영재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다
- 6년 간의 R&E 컨설팅 여정
이정현 교수(고려대학교 화공생명공학과)
2020년 10월, 부산광역시교육청영재교육진흥원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하는 '과학영재 창의연구(R&E) 프로젝트'에 전문가 컨설팅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평소 과학 인재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흔쾌히 수락했다. 어쩌면 과거 과학고 진학에 실패했던 필자로서는, 오늘날 영재 과학고 학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5년을 넘어섰고, 그간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쓴다.
열정 가득했던 첫 만남과 성장의 기억
2020년 첫 컨설팅을 맡게 된 팀은 '항생제 코팅 역삼투막의 바이오파울링 저감효과'를 제안한 인천과학고였다. 4명의 1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이 팀은 나의 첫 컨설팅 대상이 이었기에 여전이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필자의 전공이자 국내에서는 다소 비주류 분야인 해수담수화/수처리용 분리막 연구를 제안한 학생들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고교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연구 배경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생체 전기효과를 이용한 파울링 저감 아이디어는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고 구체적이었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질문에 필자 또한 최선을 다해 참고문헌과 특수 실험용 소재를 지원하며 화답했다.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며 필자 역시 큰 자부심을 느꼈다. 이 학생들이 훗날 연구 현장에서 다시 만나길 기대해 본다.
현장과 온라인을 넘나드는 탐구의 장
2021년에는 지정주제형 창의연구(R&E)에 참여하여 천연물 항균 코팅 및 생분해성 필터 소재 개발을 제안했고, 평가를 통해 강원과학고와 인천진산과학고 팀이 선정되었다. 학생들은 고려대학교를 방문해 현장 연구컨설팅을 진행하고 필자의 연구실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팀 모두 환경과 관련된 창의적인 연구 아이디어(친환경 흡착 소재, 항균필름 제작)를 제안하였다. 특히 불가사리와 버섯 균사체를 활용해 중금속을 흡착하겠다는 강원과학고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학생들은 정규 컨설팅 시간 외에도 여러 차례 실험관련 문의를 계속하였고, 필자와 소속 박사과정 연구원이 협력하여 소재 구조 분석을 돕는 등 밀착 가이드를 제공한 끝에 학생들은 스스로 문제를 극복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인천진선과학고 학생들은 탄소섬유를 이용한 항균필름을 제작하는 연구를 제안하였고, 학생들이 최선을 다해 제작한 필름의 항균 특성 분석을 도와주어 완성도 높은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022년에도 지정주제형 창의연구(R&E)에 참여하여 천연물 항균 코팅 및 플라스틱 물질개발을 제안했고, 평가를 통해 경북과학고와 인천진산과학고 팀이 선정되었다. 선정된 연구팀들은 한차례 고려대학교를 방문해 현장 컨설팅을 진행하고, 이후 화상 컨설팅을 진행하였다. 경북과학고는 우유에서 추출한 카제인을 활용하여 플라스틱을 개발하는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였다. 학생들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연구에 임하였으며, 연구주제의 적합성, 분석방법, 실험시 문제점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졌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참고 문헌을 찾아 공유해주었으며, 여러 차례 화상 및 이메일 컨설팅을 통해 연구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2023년에는 경남과학고와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 팀들과 호흡을 맞췄다. 특히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 팀은 폐플라스틱의 중금속 흡착 특성을 연구하는 도전적인 과제를 제안하였다. 기존 연구와 중복되는 부분은 연구 방향을 수정해주며 실질적이고 의미있는 연구 결과가 도출되도록 이끌었다.
글로벌 R&E: 언어와 분야의 장벽을 넘어서
2024년에는 한-미 고등학생 연구팀이 그룹을 구성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국제적인 마인드를 함양하려는 취지의 '글로벌 협력 R&E' 프로그램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필자는 선발된 제주과학고(폐감귤박, 폐해조류를 활용한 표면개질을 통한 바이오차 제작 및 공기정화 필터 개발)와 경기북과학고(강황 추출물 염색 섬유의 관개용수 수질 개선용 필터 활용 가능성 탐구) 팀의 컨설팅을 진행했다.
이들은 미국의 Newtown High School (How does neighborhood and built environment impact the education and career paths of children in poorer communities)과 한 그룹이 되어 화상으로 연구 내용을 서로 공유했다. 한국 팀은 과학 기술적 주제를, 미국 팀은 사회과학적 주제를 다뤄 서로 생소한 분야였고,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도 존재했다. 짧은 컨설팅 시간 내에 서로의 연구를 완벽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질문을 던지며 소통하려 노력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후, 11월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학술교류회 행사에서는 글로벌 협력 R&E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한-미 학생과 교원들이 참석하였고, 학생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포스터로 발표하고, 다른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은 자신의 연구를 타인에게 어필하고 설득하는 '연구자로서의 소중한 경험'을 몸소 체험하며 한 단계 더 성장해갔다.
2025년에는 글로벌 R&E 프로그램이 한층 더 활성화되었다. 필자는 화학 분야의 주제를 제안한 경남과학고(에어컨 응축수 재활용을 통한 쿨링포그 시스템 효과 분석),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키토산을 활용한 수중 항균 효과 비교), 경산과학고(폐폴리아마이드 소재를 활용한 마이크로시스틴 흡착 필터 개발과 효용성 연구), 대전과학고(지속 가능한 탄소 저감을 위한 래틀 구조 기반 소재의 CO2 흡착 특성 분석) 등 4개의 한국 팀의 컨설팅을 맡아 미국의 Cheshire High School 팀과 함께 그룹 활동을 이어갔다. 컨설팅은 한-미 팀과 함께 화상으로 총 2회 진행하였다. 화상 컨설팅 과정에서 분야의 상이함으로 인해 깊이 있는 교감이 다소 어렵다는 점이 감지되기도 했으나, 학생들은 연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특히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팀은 천연물에서 키토산을 직접 추출해 항균성을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실패를 겪었지만, 필자의 추가 자문과 문헌 제공을 통해 결국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대전과학고 팀 역시 제조 소재의 구조 분석에 난항을 겪었으나, 필자의 연구실에서 분석 실험을 지원한 끝에 최선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12월에 진행된 온라인 성과교류회(Padlet 활용)에서는 총 8개의 그룹 25개팀이 화학, 물리부터 사회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연구결과를 영어로 발표하였다. 모든 학생이 발표에 참여하며 긴밀히 협력했고, 여러 컨설턴트들의 다각적인 온라인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연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길렀을 것이라 확신한다.
더 나은 R&E를 위한 제언과 기대
6년여간 많은 과학영재와 호흡하며 R&E 프로젝트를 진행해오면서 현실적인 한계들을 마주할 수 있었고, 이는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첫째, 연구의 출발선이라 할 수 있는 선행연구 조사 환경의 개선이다. 학생들이 제안한 아이디어 중 상당수가 이미 기존 논문으로 보고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학생들의 조사 부족이라기보다 학술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 권한이 학교 현장에서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유료 논문이나 해외 학술지에 대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준다면, 학생들이 보다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연구 주제를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첨단 분석 장비 활용을 위한 지역 사회의 인프라 공유가 절실하다. 참신한 가설을 세우고도 이를 검증할 분석 장비가 없는 사례를 볼 때 가장 안타까웠다. 지역 내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소가 보유한 장비들을 학생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나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보다 완성도 있는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셋째, 글로벌 R&E의 연구 주제 통일화가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과 교류한다는 취지는 좋으나, 과학과 사회과학처럼 분야가 너무 상이하면 깊이 있는 기술적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가급적 유사한 과학적 테마를 가진 한-미 팀들을 매칭한다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데이터와 실험 방법론으로 소통하는 '진정한 의미의 학술적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어린 동료들에게
비록 몇 가지 개선 과제는 남아있지만, R&E는 학생들이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연구자의 삶'을 미리 경험해 보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주입식 교육의 틀 안에서 수동적인 학습에 익숙했던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들을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자로 성장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현장에서 학생들의 눈동자 속에 담긴 호기심과 열정을 목격할 때마다 필자 역시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이 값진 경험을 토대로 미래의 과학 기술계를 이끌어갈 학생들의 성장을 변함없이 응원할 것이다. 언젠가 학회장이나 연구 현장에서 성숙한 연구자가 된 이들을 '어린 제자'가 아닌 '든든한 동료'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해 본다.
